분노 유발의 심리학
1. 피해망상 또라이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 사람.
피해망상 또라이는 (전문용어로는 편집성 인격 유형) 우선 상대의 중립적 행동은 물론이고 친절한 행동까지도 악의나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특징을 보인다. 모든 사람이 나쁜 의도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대하기가 다소 불편하다. 이런 사람이 집주인이면 아마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들이닥쳐 소중한 자신의 부동산에 혹시 흠집이라도 나지 않았는지 감시할 것이다.
세입자가 자기 돈 들여 예쁘게 인테리어를 했어도 자신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탓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착하고 친절한 사람도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해 자기 인생을 스스로 고달프게 만드는 유형이다. 나이가 들어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던 중에 도와주겠다는 친절한 젊은이를 만나도 화를 버럭 내며 짐을 확 뺏거나 경찰을 부를 것이다. 그 젊은이가 짐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그냥 도망가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사기꾼들의 수법이 날로 교묘하고 대담해지는 세상이다. 피해망상 또라이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자고로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은 인간은 모조리 내쫓아 버려야 안심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위험할 수 있으므로 피해망상 또라이는 대부분 아주 고독하게 산다. 외로운 것이 위험한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그들은 그 고독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리고 인간보다는 동물이 차라리 덜 해롭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이빨이 날카로운 큰 개가 제일 적격이다. 사방에서 자신을 노리는 범죄자들을 모두 그 개가 막아줄 테니까.
어쩌다 피해망상 또라이가 되었을까?
그런데 그들은 왜 온 세상이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
(아, 물론 요즘 뉴스를 보고 있자면 세상 천하태평인 사람도 금방 그런 확신이 들겠다 싶기는 하다. 게다가 피해망상 또라이는 고독한 삶을 살 기 때문에 세사에 관한 지식을 주로 TV와 인터넷에서 얻는다.)
심리 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부족하게 받았거나 거부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도 그 부모는 아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바라는, 다시 말해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부모였을 것이다. 자식을 부모의 욕구를 채워주는 대상으로 본다는 뜻이다. 앞에서 잠시 소개했던 완벽한 부모를 기억하는가? 자식을 '완벽하게' 키울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사람들 말이다. 부모의 그런 기대와 욕망은 아이를 피해망상 또라이로 만들 위험성을 높인다.
그들에게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이웃에게 보여줄 자랑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집에서 흔히 키우는 기니피그와 존재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가정의 부모는 예뻐해 주고 싶을 때는 마구 잡이로 예뻐해 주지만, 실제로 기니피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 없는 주인처럼 자식을 다룬다. 아이가 졸려해도, 친척들이 와서 여기저기 쓰다듬어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는 털만 안 날릴 뿐인 기니피그이니 말이다.
아이가 조금 크면 부모는 마음에 드는 옷을 마치 인형 놀이하듯 아이에게 해놓고 즐거워한다. 귀여운 그림이나 글자가 적힌 티셔츠 정도는 그래도 봐줄 만하다. 우아한 고급 드레스나 정장은 손빨래나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니 절대 더럽히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의를 준다. 가족 외출은 엄마 아빠가 나가고 싶거나 좋은 부모 노릇이 하고 싶을 때만 가능하다.
아이가 밖에서 친구랑 놀겠다고 울어도 엄마 아빠는 이를 무시하고 아이를 차에 태워 교외의 숲 속 카페로 데려가 아이스크림을 먹게 한다. 나무가 빽빽한 수풀 속을 달리는 동안 불신의 벽이 생기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넘친 만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아이의 욕구 만족이 아니라 부모의 필요 충족이다.
아이가 떼를 쓰면 부모는 감사할 줄 모른다거나 까탈스럽게 군다고 야단친다. 실제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줬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웃집 아이들은 자식을 잘 못 챙기는 부모를 만나 진흙바닥 놀이터에서 뒹굴고 있는데,
자기는 부모덕에 잘 꾸며놓은 카페에 와서 비싼 아이스크림까지 먹어 놓고도 그런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일이 가끔 생기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아이에게 우스꽝스러운 옷을 몇 번 입혔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모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녀의 욕구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던 경험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잦아질수록 쌓이게 되는 분노의 벽도 높아진다. 아이의 무의식 속에서는 적개심이 서서히, 하지만 견고하게 자란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소망이나 욕구가 충족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부모가 오직 아이만을 위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아이는 언제나 수동적 참관자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 저항하려는 시도는 전부 '배은망덕한 파렴치' 행위로 치부되며 야단맞는다. 더구나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오롯이 다 받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이는 자기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사람을 찾지 못한다. 되레 주변에서 "부모에게 감사해야 해. 이렇게 잘 키워주고 다 해주는 부모가 어디 있어."와 같은 말을 듣는다. 흙바닥에서 뛰어놀던 동네 친구들 또한 시기심에 불타올라 이 아이와 놀아주지 않는다.
욕구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다 보니 이 상처받은 아이는 분노와 적개심을 결국 다른 사람에게 투영한다. 친절하게 행동하며 다가오는 모든 사람은 일단 경계 대상이다. '분명히 다른 무슨 속셈이 있을 거야. 저기에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뭐라도 자기한테 득 되는 일이 있지 않고서야 어째서 나한테 잘해주겠어? 아무리 내게 친절해도 나를 생각해주는 것이 아니야! 결국 자기들이 만족하려고 나를 이용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런 아이는 자라서도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정말 이해심 많은 파트너를 만나더라도 어린 시절 경험이 머릿속에 너무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질투심에 고통받거나 속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므로 이전보다 자신의 성향에 더 잘 저항할 수는 있지만, 그는 한 번도 타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승리 아니면 항복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분쟁에 휘말리고 필요하다면 소송을 거는 등 법적 수단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에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되풀이되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는 '저 인간이 이런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저렇게 생난리를 치며 반응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실제로 그리 나쁜 분위기도 아니었고, 좋은 말 몇 마디 주고받고 끝날 수 있었던 일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피해망상 또라이는 다정하게 말해봤자 어차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경험으로 터득해온 인간이다. 다른 사람 모두가 비정상이고, 자기 권리는 스스로 치열하게 싸우서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싸우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 타인의 친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아무 이익도 없는데 괜히 내게 잘해줄 리가 있겠는가?'라는 확신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그렇게 악순환은 계속된다. 상대가 악의를 품었다고 생각하면 상대에게 부당한 행동을 할 것이고 부당한 행동을 당한 상대가 가만히 있지 않고 부당한 반응을 보이면 자기 생각이 옳았다고 믿는 것이다. 심리학에선 이를 두고 '투사적 동일 Projectove Identitication'라는 꽤 있어 보이는 용어를 쓰지만, 사실 옛날부터 우리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고, 그 당사자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예상이 옳았다며 무릎을 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에 학대까지 더해졌다면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한창 어울려 놀던 중에 엄마 아빠에게 억지로 끌려 나오는 상황이라면 어떤 아이도 밝게 웃으며 따라가지 않는다. 이때 아이가 그냥 시무룩한 수준에 그치지 않고
떼를 쓰고 울고불고하자 부모가 등짝을 후려 팼다면, 그 행위가 아이의 신뢰감 형성에 유익한 영향을 줄 리가 없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그대로 표현했는데, 그것이 무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이런 경험은 훗날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을 불신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의 수단을 선택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다. 피해망상 또라이의 불만이 가볍게 나타날 때는 진정서를 쓰거나 소셜 네트워크에 비난의 글을 올리는 수준으로 끝나겠지만, 그 정도가 더 심해지면 법적 대응도 불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가 자기감정과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심각한 경우에는 직접 응징에 나서거나 정치적,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깊은 불안감과 무기력함의 표현이다. 제 아무리 마음이 넓은 기니피그도 너무 자주 괴롭힘을 당하면 물기 마련이니까.
피해망상 또라이에게는 어떻게 대처할까?
그 사람이 어쩌다 그런 또라이가 되었는지 알기만 해도 문제를 거의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다. 피해망상 또라이는 세상 모두가 자기보다 더 심각한 또라이이므로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서 이런 태도는 일종의 자기 보호행위다. 지금껏 그는 주변 사람들과 긍정적인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우선 부모가 신뢰감을 충분히 전달해주지 못했고, 자라서는 자신의 행동 탓에 금세 사람들에게 배척당했다. 부당하게 남을 비난하고 덤비는 인간과 누가 가까이하고 싶겠는가. 피해망상 또라이와 잘 지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며, 피해망상 수준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따라 달라진다. 증상이 가벼운 정도라면 그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오해를 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삐쳐이거나 입을 닫아버리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거나 비웃는 것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방법이다. 애당초 남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자기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하게 해서 더 강하게 반발할 여지를 제공하는 셈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정말 소중한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와의 관계에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묻고, 가능한 데까지는 다 들어준다. 하지만 납작 엎드려 왕처럼 떠받들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기 부모가 했던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려 할지도 모른다 그는 무엇보다 타협하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와 협상할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예를 들어 함께 휴가를 가기로 했는데 그는 산에 가기를 원하고, 파트너인 나는 물에서 수영하고 싶다고 하자. 이때 올바른 타협안은 산속에 호수가 있는 곳을 찾아가 휴가를 함께 보내는 것이다. 그는 산에 오를 수 있고 나는 수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다음, 이듬해에는 암벽이 있는 바다로 휴가를 가면 된다. 어쨌든 그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망상 또라이에게는 인간에 대한 신뢰 회복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피해망상에게도 장점은 있다. 타고난 불신 덕분에 절대 사기꾼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그를 속여먹으려면 사기꾼 또한 그에 못지않은 특급 또라이여야 한다. 그렇게 만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피해망상 또라이는 그런 사기꾼을 그냥 곱게 보내주지도 않는다. 조심성만큼이나 복수심도 투철한 유형이라 상대의 흑심을 눈치채면 사기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끝까지 쫓아가 응징하고야 만다. 피해망상 또라이는 대부분 정의감에 매우 투철하다.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종종 범죄자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막대한 권력과 범죄자
수용소를 소유한 독재가가 되지 않는 이상 피해망상 유형의 인간이 심각한 비극을 몰고 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불신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은 출세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잘못 이끌리거나 치우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피해망상 또라이를 정말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자신의 성격이다. 누구든지 의심하고 나쁜 사람으로 몰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서도 이런 성격의 인물은 무고한 주인공을 뒤쫓는 인정사정없는 경찰이나 판사로 종종 등장한다. 때로는 내적 모순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빅토르 위고 Victor Hugos의 소설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에 등장하는 자베르 경감 Inspector Javert이다.
<분노 유발의 심리학 책 中> -저자 클라우디아 호흐 브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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