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님의 호 백범에 얽힌 이야기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조국과 민족에게 헌신한 그가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백정범부白丁凡夫, 즉 천한 직업의 백정과 보통의 사내라는 범부라는 말에서 따 지었다. 이를 보더라도 구는 지위의 높고 낮음, 배우고 배우지 못하고, 잘 살고 못 사는 것 등에 편견을 두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허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음이 어질지 못하면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그의 호 백범을 흰색의 호랑이인 백호白虎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임시정부의 주석이라는 신분에는 백호, 즉 백범이 잘 어울리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구는 사람을 대할 때 차별을 두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생각했으며 누구에게나 겸허하게 대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 있어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첫째는 그의 집안 내력에서 볼 수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자손이다. 고려시대에는 공신으로 살았지만, 조선 중기 때 선조인 김자점이 반역죄를 지은 후 화를 면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평민으로 살아왔다. 그런 연유로 선조 주엔 변변한 벼슬을 지낸 사람이 없었다. 김구의 부친은 존위로서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한 게 고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반 같지 않은 양반들에게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만 했다. 그는 이런 집안 내력으로 인해 양반에 대한 불신감이 컸다. 그 반면에 평민이나 천민에 대해서는 따듯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강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이 누구에게나 겸허한 마음이게 했다. 둘째는 동학東學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면서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의미로 사람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동학사상에 깊이 매료되었다. 동학은 김구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셋째는 개신교에 입교하면서 인간에 대해, 신학문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기독교 정신은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갖게 했으며, 훗날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 크게 작용했다. 이 세 가지가 김구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고 겸허하게 대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 金九 1876-1949
(임시정부 주석, 독립운동가, 평생 독립을 위해 투신.)
출처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 수업 365 책中》 -저자, 김옥림 님
학사루 현판이 불태워진 이유
※ 학사루 :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가 큰 2층 누각이다.
(김종직과 유자광의 사적인 원한이 발전하여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 현판 :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다는 널조각. 흔히 절이나 누각, 사당, 정자 따위의 들어가는 문 위, 처마 아래에 걸어 놓는다.
김종직은 조선 전기 문인이자 문신이며, 성리학자, 사상가, 교육자이다. 그는 정몽주에서 길재로, 길재에서 그의 아버지인 김숙자에게 이어진 학풍을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킴으로써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으며, 사람파의 시조가 되었다.
김종직은 인품이 높고, 올곧은 정신과 뛰어난 학식, 학문과 행동이 일치하는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도를 추구했다. 뿐만 아니라 옮고 그름에 정확했으며, 그 어떤 시류에도 물들지 않고, 의리와 믿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한 그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드는 범이 없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중앙 정계를 떠나 병든 노모를 돌보기 위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일이다. 유지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본 후 감탄하여 쓴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 놓은 것을 김종직이 보게 되었다.
"아니, 유지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한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어찌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내려 불태워버려라."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하겠느냐? 쌍놈은 쌍놈이니라."
그의 추상같은 명령에 이방은 얼른 현판을 내려 불태워버렸다. 그는 유자광을 소인배라 칭하며 몹시도 멸시했다. 유지광은 세도가였지만 그이 미움을 산 것은 그가 충신인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죽게 했다는 이유에서다. 김종직은 그가 믿음에 근본이 없고, 정의와 의리에 벗어난 하찮은 것으로 본 것이다. 나중에 이를 안 유자광은 아무 소리 못하고 속만 태웠다. 비록 김종직이 자신보다 한참이나 직위가 낮았지만, 그를 상대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쪽 같은 굳은 절개를 지닌 인물로 그의 눈밖에 벗어나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외면하고, 그와는 절대로 상종하지 않았다.
*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 영남학파의 종조로 사림파 시조, 저서 <점필재 집>, <유두 유록>, <청구 풍아>, <당 후일기>, <동문수> 외 다수)
출처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 수업 365 책中》 -저자, 김옥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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