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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이성계와 정도전의 밀담 & 박문수의 실행력

by La Vida verdee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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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정도전의 밀담


이성계가 대업을 이루게 한 정도전의 결정적인 말이다.

"장군, 제가 바라는 나라는 덕을 갖춘 임금이 예를 갖추는 왕도정치의 나라며, 귀족이 아니라 백성이 근본이 되는 나라입니다. 또한 가문의 혈통이 아니라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벼슬을 할 수 있고, 백성이라면 자기 땅을 갖고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나라이며, 모든 백성이 군자가 되어 사는 나라입니다."

"뜻은 좋지만 나는 그러 생각이 없소."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새로운 나라의 필요성을 말하며 이성계가 중심이 되어 달라고 말하자, 이성계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대업을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묻자 이성계는 칼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정도전은 자신 또한 피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며, 힘을 앞세워 폭력으로 세운 나라는 망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정통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도전은 덕을 앞세워 백성을 근본으로 세운 나라는 천 년을 간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이성계는 말했다.

" 정통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그것은 백성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저는 그런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말을 듣고도 무덤덤해했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대업을 이루자며 권한 말이다. 그의 말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것은 반역을 획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마음만 먹으면 그를 반역죄로 처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물론 이성계의 마음을 간파한 정도전의 계산된 말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도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성계에게 대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정도전은 누구를 만나도, 자신이 생각을 말할 때는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화통하다'는 것은 바로 정도전을 두고 하는 말과 같다. 결국 이성계는 직설화법에 넘어갔고 그와 함께 대업을 이루었다.

 

 

* 鄭道傳 1342-1398

(조선 전기 정치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밑그림을 설계하고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준 책략가. 주요 저서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외 다수

 

 

출처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수업 365 책中》 -저자, 김옥림 님

 

 

 

박문수의 실행력


조선 영조 때 정치가이자 암행어사로 이름을 날린 박문수는 실행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계속되는 가뭄에 백성들이 굶주리자 영조의 명을 받고 어사로 나간 그는 탐관오리들을 엄격히 문책하고, 자신의 곳간의 쌀을 백성들에게 내주었따. 그는 곡식관매를 통해 전국 규모의 세금을 탕감하고, 문무백관의 녹봉을 감할 것을 주장했으며, 30세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한 남녀들을 조사해 혼수를 대주어 혼사시킨 수가 74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박문수가 경상도 관찰사 시절 영일만에 가재도구들이 산더미처럼 떠내려와 함경도에서 수해가 난 걸로 판단하고 즉시 쌀 삼천 석을 보내 구휼하여 그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조정에 허락 없이 관청의 쌀을 보내는 것은 문책을 받을 사항이라, 주변에서 그를 말렸을 때 이렇게 말햇다.

"내가 문책받는 것은 작은 문제이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큰 문제다."

박문수의 말엔 자신의 안위보다도 백성을 더 아끼고 염려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선처에 감동한 함경도민들은 고마운 마음을 표하기 위해 '북민감은비'라는 송덕비를 세워 그를 칭송했다. 

 

이어 박문수는 관료들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주자고 했으나, 신하들이 극구 반대하여 녹봉을 삭감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로 인해 관료들로부터 욕설을 당하고 심한 배척당함을 감수했다. 당시에 군역으로 인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전란과 대기근으로 급격히 줄어든 군역의 대상자 수로 인해 할당된 군포는 증가하고, 양반들은 군역부담에서 제외 돼 그 몫까지 백성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던 것이다. 이에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균역법을 제정하고, 군포를 년 2필에서 1필로 줄임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또한 병조판서(조선시대에 둔, 병조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이품으로, 군사와 국방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따.)가 되어 병조 자체에 인신印信(도장이나 관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일처리에 불편을 주고, 간리奸吏(간사한 관리나 공리)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어 군기의 중요성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 할 수 있는 바, 영조에게 주청해 병조판서와 이군색二軍色(조선 시대에, 병조에서 기병과 보병의 보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부서)의 인신印信을 만들어 병조를 혁신시켰다.

 

 

* 朴文秀 1691-1756

(조선 후기 문인. 암행어사로 유명. 병조판서. 호조판서.)

 

 

출처 《1일 1페이지 짧고 깊은 지식수업 365 책中》 -저자, 김옥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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